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

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 luna dac featured rotated

변명 아니고 설명이다. 아닌가. 변명일 수도.

64 Audio U12t. 12개 BA 드라이버가 들어간 커스텀 IEM. 여기에 Effect Audio Eros S II 케이블. 그리고 Luna DAC. 다 합치면 얼마냐고? 안 말한다. 카드 명세서는 내가 관리한다. (DAC가 뭔데 싶으면 거기 썼다.)

3만원짜리에서 시작했다

근데 사실은. 3만원짜리 에어팟 짝퉁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잃어버려서 싼 거 사고, 잃어버려서 또 사고, ADHD에 무선 이어폰은 안 맞겠다 싶어서 유선으로 넘어왔다. 처음에는 동네 이어폰 가게에서 5만원짜리 샀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Head-Fi를 열었다. Reddit r/headphones를 열었다. 거기서부터 잘못됐다.

BA 드라이버라는 게 있다. Balanced Armature. 원래 보청기 기술이었는데 오디오쪽으로 넘어온 거다. 싱글 BA에서 시작해서 듀얼, 트리플, 쿼드, 그리고 지금은 12드라이버까지 나온다. 각 드라이버가 다른 주파수 대역을 담당하는데 초기 BA는 저음이 약해서 다이나믹 드라이버랑 하이브리드로 조합하기 시작했고 거기서 크로스오버 설계가 중요해지면서 — 이건 너무 길었다. 어쨌든 소리가 좋다는 말이다.

U12t 처음 꽂은 날

같은 노래인데 악기가 이렇게 많았나. 보컬 뒤에 깔린 패드 소리가 들리고, 베이스에 텍스처가 있고, 심벌이 공기 중에서 퍼지는 게 느껴졌다. 3만원짜리에서는 그냥 뭉개진 소리 덩어리였던 게 레이어가 갈라졌다.

친구들은 차라리 고기 먹자고 했다. 이어폰 하나에 소고기 몇 번을 먹냐고. 맞는 말이다. 근데 소고기는 먹으면 없어지잖아. 이어폰은 남아있다. 이건 좀 궁색한 논리인 거 안다.

지오가 카드 내역 보고 뭐라 했는데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안 적겠다.

케이블도 바꿨다. Eros S II. 케이블 바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말, 반은 맞고 반은 플라시보다. 근데 플라시보여도 내 귀에 좋으면 그만 아닌가. 이것도 좀 궁색하다. 알고 있다.

외출할 때는 AKG N5005에 DragonScale 케이블 끼고 나간다. U12t는 밖에 들고 다니기가 무섭다. 지하철에서 떨어뜨리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 난다. N5005도 비교 안 하면 충분히 좋다. 문제는 비교를 이미 해버렸다는 거지.

Arch Linux 터미널에서 mpd 돌리고 ncmpcpp 비주얼라이저 켜놓고 U12t로 듣는 밤이 있다. 서하 재우고 리코도 잠들고, 어두운 방에서 터미널 막대기가 주파수 따라 춤추는 걸 보면서. 이건 설명이 안 된다. 소리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고 하면 오타쿠 같은데 진짜 그렇다.

합리화일 수 있다

이 모든 게 합리화일 수 있다. 비싼 거 사면 좋은 이유를 억지로 만들게 되니까.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다고 어디서 읽었다. 인지부조화 감소. 뭐 그런 거.

근데 매일 아침 이어폰 꽂고 재생 버튼 누르면 그 소리가 나온다. 매일이다. 1년 넘게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질리지 않았다.

후회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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