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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선 이어폰 아직도 쓰는 사람

    유선 이어폰 아직도 쓰는 사람

    블루투스 왜 안 쓰냐고 자꾸 물어봐서.

    충전이 필요 없다

    배터리가 없다. 충전할 필요가 없다. 아침에 나가기 전에 이어폰 배터리 확인하고 케이스 배터리 확인하고 혹시 간밤에 충전 안 됐으면 급속충전 걸어놓고 그 시간에 나갈 준비 하고.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꽂으면 나온다. 10시간 비행기에서도 나온다. 밤새 듣다 잠들어도 아침에 여전히 나온다.

    압축 없는 소리

    블루투스는 SBC든 AAC든 LDAC든 결국 코덱으로 압축해서 무선으로 쏜다. 유선은 DAC에서 이어폰까지 전기 신호 그대로 간다. 차이가 크냐? 좋은 이어폰일수록 크다. 128kbps MP3랑 FLAC 구분 못 하는 귀도 있고, 그런 사람한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음질 이야기를 좀 더 하면. Luna DAC에 N5005 꽂아서 Nils Frahm 피아노곡 들으면 피아노 해머가 현을 치는 어택이 들린다. 잔향이 방 안에서 퍼지는 게 느껴진다. 같은 곡 에어팟으로 들으면 피아노 소리가 난다. 둘 다 피아노인데 다른 악기 같다. 아 근데 에어팟 잃어버린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닌데, 에어팟은 진짜 많이 잃어버렸다. 짝퉁까지 합치면 한 다섯 개는 사라졌다. 유선은 몸에 붙어있으니까 물리적으로 잃어버리기가 어렵다. ADHD한테는 이게 꽤 크다.

    딜레이 0ms

    레이턴시. 영상 볼 때 입이랑 소리 안 맞는 거. 블루투스 쓰면 코덱에 따라 40ms에서 200ms까지 딜레이가 생긴다. 유선은 0이다. 유튜브 볼 때 입 모양이랑 대사 타이밍 안 맞으면 미묘하게 불편하다. 게임은 더 심하다. 총 쏘는데 소리가 늦게 나오면 그게 맞은 건지 아닌 건지.

    단순한 게 좋다

    케이블, 드라이버, 커넥터. 끝이다. 펌웨어 업데이트도 없고 앱 연동도 없고 블루투스 페어링 충돌도 없다. 에어팟이 맥이랑 아이폰 사이에서 자동 전환된다고 하는데 그게 안 될 때 짜증이 무선의 단점 전부를 요약한다. 유선으로 돌아간 이유가 결국 이거다.

    줄 만지작거리는 게 좋다. 이유는 없다.

    이어폰에 50만원 쓴 변명은 따로 썼다.

  • 출퇴근길 음악

    출퇴근길 음악

    7시 48분, 4호선

    7시 48분. 4호선. 자리 없다. 이어폰 꽂는다.

    서하가 6시에 깼다. 분유 타고 기저귀 갈고 안아주고. 리코 밥 주고. 전쟁 같은 아침을 지나서 지금 여기 서 있다. Luna DAC에 N5005 연결. 재생.

    이어팁이 귀를 막는다. 물리적으로. 지하철 소음이 한 겹 뒤로 밀린다. 안내방송, 기침 소리, 문 닫히는 소리. 다 멀어진다. ANC 같은 건 아니다. 그냥 실리콘이 귀를 막고 있는 거다. 배터리도 안 든다.

    아침에 맞는 소리

    피곤한 아침이다. lo-fi를 건다. 느린 비트 위에 피아노 루프. 눈이 감긴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기분 좋은 날도 있다. 서하가 밤에 안 깨고 6시간 잔 날. Daft Punk “Around the World” 걸면 발이 박자를 탄다. Justice “Genesis” 들으면 이 지하철이 좀 다른 곳 같다. 비 오는 아침에는 재즈. 빗소리 위에 피아노가 겹친다. 이어팁 밖으로 빗소리가 아주 조금 새어 들어오는데 그게 또 괜찮다.

    mpd 셔플을 돌릴 때도 많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 3천 곡 넘게 넣어놔서. 앰비언트 다음에 일렉트로닉 다음에 포크. 맥락이 없는데 아침에는 그게 맞다.

     

    오피스, 이어폰 없는 시간

    오피스. 이어폰 뺀다.

    오픈 플로어. 키보드 소리. 누가 통화하는 소리. 커피 머신 돌아가는 소리. 자판기 동전 떨어지는 소리. 30분 전까지 Nils Frahm 피아노 위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형광등 밑에서 슬랙 알림을 받고 있다. 이어폰을 다시 끼고 싶다. 회의 시간까지 40분. 참는다. 참다가 못 참고 끼는 날도 있다. 음악 안 틀고 그냥 귀마개로. 소음 차단만으로 집중이 달라진다. 유선 IEM 이어팁이 실리콘이라 물리 차단이 확실하다. 사무실이 조용해지면 키보드 치기가 편하다.

     

    퇴근길, 다른 음악

    6시 12분. 퇴근. 다시 4호선.

    아침이랑 다른 음악이 맞다. Nils Frahm “Says”. 피아노 건반이 느리게 내려앉는다. Olafur Arnalds. 현악 위에 일렉트로닉이 얇게 깔린다. Brian Eno “Music for Airports”. 소리인지 공기인지 구분이 안 된다. DAC 하나 끼워서 듣는 거랑 폰 직접 연결해서 듣는 거랑 이런 곡에서 차이가 크다.

    창밖이 어두워진다. 건물 불빛이 지나간다. 앰비언트 위로 지하철 진동이 아주 미세하게 섞인다.

    아무것도 안 틀고 이어폰만 끼고 있는 날도 있다. 소음 차단만으로 충분한 날. 조용한 게 음악보다 나은 저녁이 있다. 하루 종일 소리에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서하 울음, 리코 짖음, 사무실 소음. 퇴근길 30분이 하루 중에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소리다. 아무 소리도 안 선택하는 것도 선택이다.

     

    집 앞

    10시 23분. 집 앞. 이어폰 뺀다. 갑자기 시끄럽다.

    그래도 이 루틴이 좋다. 이어폰에 50만원 쓴 게 아깝지 않은 이유가 매일 여기 있다.

  • DAC가 뭔데

    DAC가 뭔데

    DAC 샀다고 하면 다들 그게 뭐냐고 한다.

    DAC가 뭔데

    Digital to Analog Converter.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기기다. 음악 파일은 0이랑 1이다. 그걸 이어폰 드라이버가 떨 수 있는 전기 신호로 바꿔야 소리가 난다. 그 변환을 하는 게 DAC.

    폰에도 들어있다. 스피커로 소리 나잖아. 근데 폰 만드는 회사들이 오디오 칩에 큰돈을 안 쓴다. 카메라 모듈, AP, 디스플레이. 거기 예산이 다 간다. DAC는 소리 나면 됐지 수준. LG가 Quad DAC라고 해서 폰에 제대로 된 오디오 칩 넣었었는데. LG가 폰을 접었다. 그 이후로 폰 내장 DAC에 신경 쓰는 메이저 브랜드가 없다.

    비유를 하나 하자면. 비싼 스피커 사놓고 벽에서 MP3를 흘려보내는 느낌이다. 아니 이건 좀 다르다. 수도꼭지를 생각하면. 정수기 물이 있는데 파이프가 녹슬었다고 해야 하나. 비유가 이상해졌다. 다시.

    그냥 폰 내장 DAC는 보급형이고 외장 DAC는 전용 장비다. 이렇게 말하는 게 정확하다.

    그래서 뭐가 다른데

    친구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대답이 궁한다. 이어폰은 건네줄 수 있는데 DAC 차이는 같은 이어폰으로 A/B 테스트를 해봐야 안다. 그걸 길거리에서 할 수는 없고.

    내 경우. Luna DAC를 처음 연결한 날, 같은 이어폰 같은 곡인데 베이스 텍스처가 달랐다. 단단하고 윤곽이 생겼다. 보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느낌. 배경 악기들 분리가 더 됐다.

    근데 이게 플라시보일 수 있다. 10만원 넘게 주고 샀는데 안 달라지면 억울하잖아. 뇌가 알아서 좋게 해석할 수 있다. 부정은 안 하겠다.

    Luna DAC. 한국 브랜드. 10만원대 중반. 크기는 라이터만 하다. USB-C로 폰에 꽂고 이어폰 연결하면 끝. 앱 설치도 드라이버도 필요 없다. 물론 DAC 효과를 제대로 느끼려면 좋은 이어폰이 있어야 한다.

    입문은 Apple USB-C to 3.5mm 동글. 만원 좀 넘는다. 이거 사실 DAC가 들어있다. 폰 내장보다 낫다는 평이 많다. 만원짜리로 차이 느끼면 축하한다. 혹은 조의를 표한다. 돈 쓸 구멍이 하나 생긴 거다.

    가격대별 차이는 올라갈수록 줄어든다. 폰 내장이랑 5만원짜리 차이는 좀 있다. 5만원이랑 15만원 차이도 있다. 15만원이랑 100만원 차이? 있긴 한데 가격만큼은 아니다. 500만원? 나는 그 영역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지갑이 버틸 수 없다.

    FLAC이랑 MP3 이야기도 해야 되는데. 소스가 128kbps MP3면 DAC가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다. FLAC이나 무손실로 들어야 DAC 차이를 제대로 느낀다. 스트리밍 서비스 고음질 요금제 쓰든가, 파일을 직접 구하든가.

    살 필요 있냐

    추천하냐고? 대부분 필요 없다. 근데 유선 이어폰으로 돌아간 나 같은 사람한테는 필수다.

  • 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

    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

    변명 아니고 설명이다. 아닌가. 변명일 수도.

    64 Audio U12t. 12개 BA 드라이버가 들어간 커스텀 IEM. 여기에 Effect Audio Eros S II 케이블. 그리고 Luna DAC. 다 합치면 얼마냐고? 안 말한다. 카드 명세서는 내가 관리한다. (DAC가 뭔데 싶으면 거기 썼다.)

    3만원짜리에서 시작했다

    근데 사실은. 3만원짜리 에어팟 짝퉁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잃어버려서 싼 거 사고, 잃어버려서 또 사고, ADHD에 무선 이어폰은 안 맞겠다 싶어서 유선으로 넘어왔다. 처음에는 동네 이어폰 가게에서 5만원짜리 샀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Head-Fi를 열었다. Reddit r/headphones를 열었다. 거기서부터 잘못됐다.

    BA 드라이버라는 게 있다. Balanced Armature. 원래 보청기 기술이었는데 오디오쪽으로 넘어온 거다. 싱글 BA에서 시작해서 듀얼, 트리플, 쿼드, 그리고 지금은 12드라이버까지 나온다. 각 드라이버가 다른 주파수 대역을 담당하는데 초기 BA는 저음이 약해서 다이나믹 드라이버랑 하이브리드로 조합하기 시작했고 거기서 크로스오버 설계가 중요해지면서 — 이건 너무 길었다. 어쨌든 소리가 좋다는 말이다.

    U12t 처음 꽂은 날

    같은 노래인데 악기가 이렇게 많았나. 보컬 뒤에 깔린 패드 소리가 들리고, 베이스에 텍스처가 있고, 심벌이 공기 중에서 퍼지는 게 느껴졌다. 3만원짜리에서는 그냥 뭉개진 소리 덩어리였던 게 레이어가 갈라졌다.

    친구들은 차라리 고기 먹자고 했다. 이어폰 하나에 소고기 몇 번을 먹냐고. 맞는 말이다. 근데 소고기는 먹으면 없어지잖아. 이어폰은 남아있다. 이건 좀 궁색한 논리인 거 안다.

    지오가 카드 내역 보고 뭐라 했는데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안 적겠다.

    케이블도 바꿨다. Eros S II. 케이블 바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말, 반은 맞고 반은 플라시보다. 근데 플라시보여도 내 귀에 좋으면 그만 아닌가. 이것도 좀 궁색하다. 알고 있다.

    외출할 때는 AKG N5005에 DragonScale 케이블 끼고 나간다. U12t는 밖에 들고 다니기가 무섭다. 지하철에서 떨어뜨리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 난다. N5005도 비교 안 하면 충분히 좋다. 문제는 비교를 이미 해버렸다는 거지.

    Arch Linux 터미널에서 mpd 돌리고 ncmpcpp 비주얼라이저 켜놓고 U12t로 듣는 밤이 있다. 서하 재우고 리코도 잠들고, 어두운 방에서 터미널 막대기가 주파수 따라 춤추는 걸 보면서. 이건 설명이 안 된다. 소리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고 하면 오타쿠 같은데 진짜 그렇다.

    합리화일 수 있다

    이 모든 게 합리화일 수 있다. 비싼 거 사면 좋은 이유를 억지로 만들게 되니까.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다고 어디서 읽었다. 인지부조화 감소. 뭐 그런 거.

    근데 매일 아침 이어폰 꽂고 재생 버튼 누르면 그 소리가 나온다. 매일이다. 1년 넘게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질리지 않았다.

    후회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