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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HD가 아빠가 되면

    진단

    ADHD 진단 받은 건 서하 태어나고 나서다.

    그전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았다. 물건 잃어버리는 빈도, 대화 중에 딴생각, 마감 전날 폭발적 집중. 근데 나름 살았다. 회사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문제가 보이긴 했는데 “원래 이런 사람이지” 하면서 넘겼다.

    서하가 나오고 나서 못 넘기겠더라.

    기저귀 가방을 30분 찾았다. 분명 소파 옆에 뒀다. 현관에 있었다. 언제 옮겼는지 기억이 없다. 젖병은 냉장고 위에서 나왔다. 냉장고 안이 아니고 위. 올려놓은 기억이 없다. 손이 그냥 거기 올려놓은 거다. 뇌가 관여 안 했다.

    병원 갔다. 의사가 말했다. “성인 ADHD입니다. 어릴 때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담담하게. 처방전 받았다. 약은 아직 안 먹는다. 예약을 잡아야 하는데 예약 잡는 걸 까먹는다. ADHD 약을 받으러 가는 걸 ADHD 때문에 못 가는 거다.

    시스템으로 버틴다

    지오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젖병은 싱크대 왼쪽, 기저귀는 소파 옆, 이유식 도구는 서랍 셋째 칸. 나를 믿을 수 없으니까 환경을 설계하는 거다.

    합리적이다.

    ADHD 뇌는 루틴을 싫어한다. 같은 일을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는 건 고통이다. 근데 아기는 루틴이 없으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운다. 수유 시간, 낮잠 시간, 목욕 시간. 폰에 알람이 15개다. 8시 수유. 9시 반 놀이. 10시 낮잠. 12시 이유식. 2시 낮잠. 알람 울리면 “아 맞다” 하고 움직인다. 10개월째 매일 “아 맞다”를 15번 한다.

    동시에 세 가지가 무너진다

    서하한테 이유식 먹이고 있었다. 당근 퓌레.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는데 서하가 뱉었다. 옷에 묻었다. 닦으면서 폰 봤다. 슬랙 알림. 읽으면서 다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데 서하가 또 뱉었다. 이번엔 바닥. 닦으려고 일어나면서 가스레인지 위에 뭔가 올려놨던 거 생각났다 아 물 끓이고 있었다 달려갔더니 냄비가 다 졸았다 서하는 의자에서 울고 있고 폰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슬랙은 안 읽은 메시지 3개 당근 퓌레는 내 바지에 묻어있고

    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매일 한 번은 있다.

    리코가 질투한다. 서하 오기 전엔 이 집의 유일한 아기였는데. 서하 장난감 물고 가고, 서하 옆에서 코를 들이밀고, 서하가 울면 같이 짖는다. 미안하다 리코야. 산책이 줄었다. 놀아주는 시간이 줄었다.

    아줌마 없었으면 무너졌을 거다. 상주 베이비시터 아줌마가 모든 걸 기억한다. 서하가 언제 먹었는지, 언제 잤는지, 기저귀 언제 갈았는지. 나는 20분 전 일도 기억 못 하는데 이분은 어제 서하가 몇 시에 뭘 먹었는지 분 단위로 안다.

    부모급여가 매달 100만 원 나온다. 0세. 아동수당 10만 원. 이게 없었으면 빡빡했을 거다. 기저귀값 분유값 이유식 재료비. 보조금24 앱에서 확인 가능하다. 돈 얘기를 왜 여기서 하냐면 ADHD 때문에 이 신청도 세 번 까먹고 네 번째에 했다.

    수면 부족이 전부를 악화시킨다.

    서하가 밤에 깬다. 한 번일 때도 있고 세 번일 때도 있다. 잠을 못 자면 다음 날 ADHD 증상이 확 심해진다. 물건 더 잃어버리고, 대화 더 못 따라가고, 짜증이 한계치를 빨리 넘는다. 커피 세 잔으로 버틴다. 버티는 건지 그냥 관성인지. 한번 끊어보려고 했다. 7일 갔다.

    서하한테 집중하고 싶다

    레고 쌓아주면서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 그림책 읽어주면서 슬랙 확인하고 싶은 충동. 바닥에 앉아서 같이 놀면서 5분 만에 폰을 든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다짐한다. 3분 후에 폰 보고 있다. 이게 주의력 결핍이라는 거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근데 의지의 문제 아니라는 말이 면죄부는 아니다. 서하한테 미안하다. 매일 미안하다.

    새벽 6시. 서하가 깼다. 나한테 기어온다. 방긋 웃는다.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오늘 서하가 웃었다. 그거면 됐다.

    피곤하다. 계획 세우다 하루 끝나는 이야기는 여기에 따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