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kt II 영상을 또 봤다. 이번 주 세 번째.
빠져드는 중
LoopOp 채널에서 8트랙 전부 쌓아가는 영상이 있다. 킥 하나 찍는 것부터 시작한다. 필터 돌리고 LFO 걸고 리버브 태우면 드럼 패턴 하나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거기에 베이스라인 얹고 하이햇 찍고 샘플 잘라서 레이어링하면 빈 화면에서 곡이 올라온다. 15분짜리 영상인데 두 번 봤다.
Elektron Digitakt II. 8트랙 샘플러 겸 드럼 머신. 스텝 시퀀서. 파라미터 락. 컨디션 트리거. 100만원 중반. Elektron 특유의 워크플로우가 있다. 한번 빠지면 다른 걸로 안 넘어간다고 한다. Red Means Recording도 라이브에서 메인으로 쓴다.
후보 리스트가 늘어난다
OP-XY. Teenage Engineering. 저 사람들은 제품을 만드는 건지 오브제를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슬림한 알루미늄 바디에 시퀀서, 신스, 이펙터가 다 들어있다. 카페에 들고 가서 비트 찍는 상상을 한다. 서하 유모차 밀면서 한 손으로 시퀀스 걸어놓는 상상도 했다. 비현실적인 건 안다.
Octatrack MKII. 이건 다른 급이다. 라이브 샘플링. 실시간으로 외부 소스 잡아서 자르고 이펙트 걸고 루프 만드는 기계. 200만원 넘는다. Bonobo가 라이브에서 쓰는 거 봤다. 그때부터 머리에서 안 지워진다.
아 그리고 OP-1 Field도 있는데 이건 250만원이라 생각을 안 하기로 했고, Model:Cycles는 가격은 착한데 FM 신스라 내가 원하는 거랑 좀 다르고, SP-404 MKII는 힙합 샘플러라서 방향이 다르고, Syntakt는 Digitakt이랑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둘 다 살 수는 없고, MPC Live는 터치스크린이 있어서 편한데 Elektron 워크플로우가 더 끌린다.
이 패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맞다, 이어폰 살 때도 이랬다. 후보 리스트 만들고 비교표 만들고 리뷰 다 찾아보고. 결국 산다.
현실 점검
중고나라에 Digitakt II가 올라왔다. 110만원. 박스 풀셋. 사진 다섯 장 다 저장했다. 확대해서 스크래치 있나 확인했다.
결제는 안 했다.
GarageBand를 한 번 열었다. 한 달 전. 서하 재우고 11시쯤. 드럼 트랙 하나 깔고 신스 소리 골라서 4마디 찍었다. 30분 정도 했다. 서하가 울었다. 밤 수유 시간이었다. 분유 타러 갔다. GarageBand는 아직 그 상태로 열려 있을 거다. 아닐 수도 있다. 맥북 업데이트하면서 꺼졌을 수도.
사봤자 먼지 쌓일 거잖아
지오한테 뭐라고 말해야 되지. Digitakt II 사고 싶다고. 서하 기저귀값 10개월치라고. 집에 놓을 데도 마땅치 않다고. 거실 책상은 분유통이랑 이유식 도구로 가득하고 방에는 서하 침대랑 내 침대가 끝이고.
일단 안 말한다.
악기를 칠 줄 모른다. 음악 이론도 모른다. 유튜브 보면 독학으로 배울 수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다. 퇴근하면 서하 돌보고 재우면 밤 11시고 밤 11시에 신디사이저 켤 수는 없다. 헤드폰 꽂으면 소리 문제는 해결되지만 에너지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서하 재우면 나도 녹초다.
사봤자 먼지 쌓일 확률이 높다. ADHD가 그렇다. 카메라 샀다가 석 달 만에 서랍에 넣었다. 태블릿도 그랬다. 100만원 넘는 장비가 인테리어가 되는 건 좀. 또 뭔가 사고 미니멀 꿈꾸고. 이 루프를 몇 번째 돌고 있는 건지.
그래서 오늘도
밤 11시. 침대. 폰으로 LoopOp가 Digitakt로 테크노 만드는 영상을 본다. 중고나라 앱을 연다. 닫는다. 연다.
서하가 크면. 그때쯤이면. 아마 그때도 이러고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