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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선 이어폰으로 돌아감

    유선 이어폰으로 돌아감

    지하철에서 이어폰 꽂는데 줄이 팔에 감긴다. 풀고 귀에 넣고 DAC에 연결하고 재생 누른다. 옆 사람이 케이블을 본다. 2026년에 유선 이어폰 쓰는 사람이 드물긴 하다.

    AirPods를 몇 번 잃어버렸는지

    AirPods를 몇 번 잃어버렸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섯 번인가 일곱 번인가. 케이스만 잃어버린 건 안 셌다. 지하철에 두고 내리고, 카페 테이블에 놓고 가고, 헬스장 락커에 두고 가고. Find My 열면 마지막 위치가 엉뚱한 곳이다. 배터리가 죽어서 추적이 안 된다. 세 번째부터는 3만원짜리 짝퉁으로 샀다. 정품 30만원을 한 달에 한 번씩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짝퉁도 잃어버렸다.

    ADHD에 작은 무선 기기는 조합이 안 된다. 열쇠도 찾고 지갑도 찾고 이어폰까지 찾으면 출근 전에 30분이 물건 찾는 시간이다.

    서랍 뒤지다가 오래된 유선 이어폰을 발견했다. 꽂아봤다.

    잃어버릴 수가 없다. 케이블이 폰에 연결돼 있다. 귀에서 빠져도 몸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집에서는 U12t, 밖에서는 N5005

    그래서 유선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64 Audio U12t. 12 드라이버 IEM이다. Eros S II 케이블에 Luna DAC 연결해서 듣는다. 가격은 말하기 싫은데 AirPods Pro 정품의 몇 배다. (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에 자세히 썼다.) 차이가 나냐고 하면 난다. 디테일이 다르고 악기 분리가 다르고 저음 텍스처가 다르다. 한번 이쪽을 들으면 돌아가기 어렵다. 근데 이걸 말로 설명하면 아무도 이해를 못 한다. 들어봐야 아는 건데 들어볼 기회가 없으니까. “더 좋아”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밖에서는 AKG N5005. DragonScale 케이블로 바꿨다. 기본 케이블보다 부드럽고 잘 안 꼬인다. U12t는 너무 비싸서 밖에 들고 다니기가 무섭다. 지하철에서 사람 부딪혀서 떨어지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

    Arch Linux에서 easyeffects로 AutoEQ 프로필을 적용해서 듣는다. U12t용 하나, N5005용 하나. 주파수 응답을 Harman 타겟에 맞추는 건데 솔직히 차이가 미묘하다. 끄고 들어도 되는데 한번 설정해놨으니까 그냥 켜둔다. 이것도 세팅하는 데 반나절 걸렸다. 세팅이 끝나면 만족감이 오고, 그 만족감이 사라지면 다른 걸 세팅하고 싶어진다. DAC도 마찬가지다. (DAC가 뭔데에서 좀 더 썼다.)

    유선의 단점은 안다. 케이블 꼬이고 주머니에서 엉키고 문 손잡이에 걸리면 귀에서 뽑힌다. 통화할 때 케이블 마이크가 입에서 멀어서 상대방이 잘 안 들린다고 한다. 운동할 때 케이블이 흔들린다. 헬스장 갈 때는 싸구려 블루투스 이어폰 쓴다.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거.

    근데 아침에 이어폰 찾을 필요가 없다. 배터리 확인 안 해도 된다. 비행기에서 열 시간 음악 틀어도 안 꺼진다.

    줄 있는 게 좋다

    줄 있는 게 좋다. 왜 아직도 유선 이어폰을 쓰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많은데, 그 이야기는 따로 썼다.

  • 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

    이어폰에 50만원 쓴 사람의 변명

    변명 아니고 설명이다. 아닌가. 변명일 수도.

    64 Audio U12t. 12개 BA 드라이버가 들어간 커스텀 IEM. 여기에 Effect Audio Eros S II 케이블. 그리고 Luna DAC. 다 합치면 얼마냐고? 안 말한다. 카드 명세서는 내가 관리한다. (DAC가 뭔데 싶으면 거기 썼다.)

    3만원짜리에서 시작했다

    근데 사실은. 3만원짜리 에어팟 짝퉁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잃어버려서 싼 거 사고, 잃어버려서 또 사고, ADHD에 무선 이어폰은 안 맞겠다 싶어서 유선으로 넘어왔다. 처음에는 동네 이어폰 가게에서 5만원짜리 샀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Head-Fi를 열었다. Reddit r/headphones를 열었다. 거기서부터 잘못됐다.

    BA 드라이버라는 게 있다. Balanced Armature. 원래 보청기 기술이었는데 오디오쪽으로 넘어온 거다. 싱글 BA에서 시작해서 듀얼, 트리플, 쿼드, 그리고 지금은 12드라이버까지 나온다. 각 드라이버가 다른 주파수 대역을 담당하는데 초기 BA는 저음이 약해서 다이나믹 드라이버랑 하이브리드로 조합하기 시작했고 거기서 크로스오버 설계가 중요해지면서 — 이건 너무 길었다. 어쨌든 소리가 좋다는 말이다.

    U12t 처음 꽂은 날

    같은 노래인데 악기가 이렇게 많았나. 보컬 뒤에 깔린 패드 소리가 들리고, 베이스에 텍스처가 있고, 심벌이 공기 중에서 퍼지는 게 느껴졌다. 3만원짜리에서는 그냥 뭉개진 소리 덩어리였던 게 레이어가 갈라졌다.

    친구들은 차라리 고기 먹자고 했다. 이어폰 하나에 소고기 몇 번을 먹냐고. 맞는 말이다. 근데 소고기는 먹으면 없어지잖아. 이어폰은 남아있다. 이건 좀 궁색한 논리인 거 안다.

    지오가 카드 내역 보고 뭐라 했는데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안 적겠다.

    케이블도 바꿨다. Eros S II. 케이블 바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말, 반은 맞고 반은 플라시보다. 근데 플라시보여도 내 귀에 좋으면 그만 아닌가. 이것도 좀 궁색하다. 알고 있다.

    외출할 때는 AKG N5005에 DragonScale 케이블 끼고 나간다. U12t는 밖에 들고 다니기가 무섭다. 지하철에서 떨어뜨리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 난다. N5005도 비교 안 하면 충분히 좋다. 문제는 비교를 이미 해버렸다는 거지.

    Arch Linux 터미널에서 mpd 돌리고 ncmpcpp 비주얼라이저 켜놓고 U12t로 듣는 밤이 있다. 서하 재우고 리코도 잠들고, 어두운 방에서 터미널 막대기가 주파수 따라 춤추는 걸 보면서. 이건 설명이 안 된다. 소리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고 하면 오타쿠 같은데 진짜 그렇다.

    합리화일 수 있다

    이 모든 게 합리화일 수 있다. 비싼 거 사면 좋은 이유를 억지로 만들게 되니까.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다고 어디서 읽었다. 인지부조화 감소. 뭐 그런 거.

    근데 매일 아침 이어폰 꽂고 재생 버튼 누르면 그 소리가 나온다. 매일이다. 1년 넘게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질리지 않았다.

    후회 안 한다.